이도(발급), 박중신(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正統三年(1438)
이 문서는 1438년(세종 20) 4월 17일에 선교랑(宣敎郞) 양양유학교도(襄陽儒學敎導) 박중신(朴中信)이 문과 정과(丁科) 제3인으로 급제하고 발급받은 홍패다. 문서를 보면, 오른쪽 위에 교지라 쓰고 가운데에 선교랑 양양유학교도 박중신이 문과 정과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는 내용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문서를 발급하는 연도와 날짜를 쓴 후 두 번째 글자와 세 번째 글자 사이에 도장을 찍었다.
이연(발급), 홍익영(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萬曆二十一年(1593)
1593년(선조 26) 8월 19일에 홍익영(洪翼英)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군자감판관(行軍資監判官)에 임명하는 문서로 고신(告身)이라 부른다. 통훈대부는 정3품 하계(下階)의 품계명이고, 군자감판관은 군자감의 종5품직 관직이다. 홍익영의 관품은 정3품이고, 관직은 종5품직으로 관품이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조선시대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행(行)'자를 관직명 앞에 명시하였다.
이연(발급), 김억추(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萬曆二十五年(1597)
이 문서는 1597년 김억추(金億秋)를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에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堂上官으로 무관에게 주는 품계 중 가장 높은 품계이다. 용양위부호군은 五衛 중 좌위인 용양위의 부호군을 말하는 것으로, 종4품직이다. 김억추가 받은 품계보다 관직이 낮기 때문에 관직 앞에 행자를 붙여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이라 하였다.
장응두(발급인), 이대성(수취인) | 1장 | 萬歷四十二年(1614)
1614년(광해군 6) 12월 11일 정로위(定虜衛) 장응두(張應斗)가 수군(水軍) 이대성(李大成)에게 토지를 방매하는 내용의 토지매매명문이다. 해당 토지의 소재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논의 지번인 이자(異字) 자호(字號)와 면적인 14짐[負] 3뭇[束]이 기재되어 있다. 방매가격은 세목(細木) 15필이다. 거래 시 넘겨주던 구문기(舊文記)와 신문기(新文記)에 관한 언급은 없다. 거래당사자 이외에 증인으로 보인(保人) 최수한(崔水漢)과 필집(筆執)을 맡은 기관(記官) 장중현(張重賢)이 참가하였다.
이종(발급), 김첨명(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崇禎九年(1636)
1636년(인조 14) 정월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학생(學生) 김첨명(金添命)을 종사랑(從仕郞)으로 임명한 고신(告身)이다. 김첨명이 임명받은 종사랑은 문관 정9품 하계에 해당하는 품계로, 인조의 명이 내려진 날은 숭정(崇禎) 9년 정월 25일이다. 문서의 발급일 좌측에는 임명사유를 기재하였는데 김첨명의 임명사유는 형 김첨령(金添齡)이 금갑도만호(金甲島萬戶)로 있을 때 계(癸)자가 들어가는 해 3월과 갑(甲)자가 들어간 해 2월에 특별히 대가(代加)하여 병초(幷超)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서 발급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서경우(徐景雨)와 가낭청(假郎聽) 1명이 참여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종사랑(從仕郞) 김첨명(金添命)을 통사랑(通仕郞)으로 임명한 고신(告身)이다. 김첨명이 임명받은 통사랑은 문관 정8품의 품계이므로 이 문서는 5품 이하 고신에 해당하며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문서의 발급일자는 숭정(崇禎) 9년 2월로 날짜는 기재하지 않았으며, 그 좌측에는 임명사유를 기재하였다. 임명사유는 형 김첨령(金添齡)이 금갑도만호(金甲島萬戶)로 있을 때, 갑(甲)자가 들어간 해 4월과 10월에 특별히 대가(代加)하여 병초(幷超)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서 발급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 박황(朴潢)과 가낭청(假郎廳) 1명이 참여하였다.
이종(발급), 김첨명(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崇德八年(1643)
1643년(인조 21)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통사랑(通仕郞) 김첨명(金添命)을 무공랑(務功郎)으로 임명한 고신(告身)이다. 김첨명이 임명받은 무공랑은 문관 정7품의 품계이므로 본 문서는 5품 이하 고신에 해당되며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본 문서의 발급일자는 숭덕(崇德) 8년 10월로 날짜는 기재하지 않았으며, 그 좌측에는 임명사유가 기재되어 있는데 김첨명이 임명받은 사유는 김첨명의 형인 김첨령(金添齡)이 무신(武臣) 겸선전관(兼宣傳官)일 때 신(辛)자가 들어간 해의 2월과 임(壬)자가 들어간 해의 5월에 별가(別加) 받은 것을 대가(代加)한 것이다.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 이덕수(李德洙)와 이조좌랑(吏曹佐郎) 심희세(沈熙世)가 참여하였다.
1643년(인조 21) 10월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무공랑(務功郎) 김첨명(金添命)을 선교랑(宣敎郞)으로 임명한 고신(告身)이다. 김첨명이 임명받은 선교랑은 문관 종6품 상계의 품계이므로 본 문서는 5품 이하 고신에 해당하며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인조의 명을 받은 날짜는 숭덕(崇德) 8년 10월 21일이고, 문서의 발급일 좌측에는 작은 글씨로 임명사유를 기재되어 있는데 김첨명이 임명받은 사유는 김첨명의 형인 김첨령(金添齡)이 무신(武臣) 겸선전관(兼宣傳官)일 때 계(癸)자가 들어간 해의 5월과 갑(甲)자가 들어간 해의 6월에 별가(別加) 받은 것을 대가(代加)한 것이다.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 이덕수(李德洙)와 이조좌랑(吏曹佐郎) 김진(金振)이 참여하였다.
이종(발급), 김첨명(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元年(1644)
1644년(인조 22)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봉직랑(奉直郞) 김첨명(金添命)을 통덕랑(通德郞)으로 임명한 고신(告身)이다. 김첨명이 임명받은 통덕랑은 문관 정5품 상계의 품계이므로 본 문서는 5품 이하 고신에 해당된다. 문서의 발급일 좌측에는 작은 글씨로 임명사유가 기재되어 있는데 김첨명이 임명받은 사유는 김첨명의 형인 김첨령(金添齡)이 무신(武臣) 겸선전관(兼宣傳官)일 때 을(乙)자가 들어간 해의 3월과 병(丙)자가 들어간 해의 4월에 별가(別加) 받은 것을 대가(代加)한 것이다.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 이덕수(李德洙)와 이조좌랑(吏曹佐郎) 심대부(沈大孚)가 참여하였다.
이종(발급), 홍진호(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元年(1644)
1644년(인조 22) 11월에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무공랑(務功郞) 홍진호(洪振湖)를 선교랑(宣敎郞)으로 임명하는 고신(告身)으로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홍진호의 구관(具官)인 무공랑은 정7품의 품계이고, 임명받은 선교랑은 종6품 상계(上階)이다. 발급일자 좌측에 '삼촌숙(三寸叔) 홍익영(洪翼英)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시(時) 계삼갑육별대가(癸三甲六別代加) 병초(幷超)'라는 임명사유가 기재되어 있으며 발급일은 순치(順治) 원년(元年) 11월이다.
이호(발급), 홍훤(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九年(1652)
이 문서는 1652년(효종 3)에 유학(幼學) 홍훤(洪藼)이 진사시(進士試)에서 입격한 사실을 증명하는 백패(白牌)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훤은 유학의 신분으로 진사시를 치렀다. 문서의 훼손으로 홍훤이 진사시에서 몇 위로 합격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효종대왕3년임진증광사마방목(孝宗大王三年壬辰增廣司馬榜目)에 홍훤이 3등 42인으로 입격하였다고 기재되어 있어, 72위로 입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 발급일은 순치(順治) 9년 10월 초3일이다.
이호(발급), 김계종(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十四年(1657)
1657년(효종 8)에 병조(兵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양인(良人) 김계종(金戒宗)을 전력부위(展力副尉)로 임명하는 교첩(敎牒)이다. 문서에서 관직명을 기재한 부분이 결락되어 임명받은 관직명은 명확히 알 수 없다. 문서에 따르면 김계종은 어영군(御營軍)의 중일시재(中日試才)에서 조총(鳥銃) 5발 중 3발을 맞춰 전력부위에 임명되었다. 김계종이 임명받은 전력부위는 종9품에 해당하는 품계이므로 이 문서는 5품 이하 고신에 해당한다. 문서의 발급일자는 순치(順治) 14년 11월로 날짜는 기재되지 않았고, 병조지인(兵曹之印)은 발급연호 위에 찍혀 있다.
이호(발급), 홍훤(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十四年(1657)
1657년(효종 8)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진사(進士) 홍훤(洪藼)을 장사랑(將仕郞) 남별전참봉(南別殿參奉)으로 임명하는 고신(告身)으로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장사랑은 종9품의 품계명이고, 남별전참봉은 조선시대 세조(世祖)의 영정과 인조(仁祖)의 생부 원종(元宗)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인 남별전을 관리하던 종9품 관직명이다.
1657년(효종 8)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장사랑(將仕郞) 남별전참봉(南別殿參奉) 홍훤(洪藼)을 종사랑(從仕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에 임명하는 고신(告身)으로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홍훤의 구관(具官)인 장사랑은 종9품의 품계명이다. 종사랑은 정9품의 품계명이며, 남별전참봉은 조선시대 세조(世祖)의 영정과 인조(仁祖)의 생부 원종(元宗)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인 남별전을 관리하던 종9품의 관직명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홍훤의 품계는 종9품 장사랑에서 정9품 종사랑으로 올랐으나 관직은 그대로 종9품 참봉이다. 발급 이유는 연호 왼쪽에 작은 글씨로 '정오별가(丁五別加)'라고 밝히고 있는데, 정유년(丁酉年)인 1657년 5월에 내려진 별가(別加)로 승자(陞資)하였다는 뜻이다. 문서...
이호(발급), 홍훤(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十五年(1658)
1658년(효종 9)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종사랑(從仕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 홍훤(洪藼)을 승사랑(承仕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에 임명하는 교첩(敎牒)이다. 홍훤의 구관(具官)인 종사랑은 문관 종9품의 품계명이고, 제수받은 승사랑은 정8품의 품계명이며, 남별전참봉은 세조(世祖)의 영정과 인조(仁祖)의 생부 원종(元宗)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인 남별전을 관리하던 종9품의 관직명이다. 문서의 발급일은 순치(順治) 15년 정월이며, 발급일 좌측에 작은 글씨로 '정십이 별가(丁十二 別加)'라는 임명사유를 기재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승사랑(承仕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 홍훤(洪藼)을 통사랑(通仕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으로 임명한 고신(告身)으로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홍훤의 구관(具官)인 승사랑은 종8품의 품계명이고, 남별전참봉은 조선시대 세조(世祖)의 영정과 인조(仁祖)의 생부(生父) 원종(元宗)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인 남별전을 관리하던 종9품 관직명이며, 임명받은 통사랑은 정8품의 품계명이다. 이 문서의 발급일은 순치(順治) 15년 3월이며, 발급일 좌측에 임명사유가 기재되어 있다.
이호(발급), 홍훤(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十六年(1659)
1659년(현종 즉위년)에 현종이 홍훤(洪藼)을 조봉대부(朝奉大夫) 행평시서봉사(行平市署奉事)로 임명한 고신(告身)이다. 조봉대부는 종4품 하계(下階)의 품계명이고, 봉사는 종8품의 관직명이다. 제수 받은 품계에 비해 관직이 낮기 때문에 조선시대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명시하였다. 평시서는 조선시대 시전과 도량형,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발급일은 순치(順治) 16년 11월로 일자는 기재하지 않았다.
1659년(현종 즉위년)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통선랑(通善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 홍훤(洪藼)을 통덕랑(通德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으로 임명한 고신(告身)으로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홍훤의 구관(具官)인 통선랑은 정5품 하계이고, 임명받은 통덕랑은 정5품 상계의 품계명이며, 남별전참봉은 조선시대 세조(世祖)의 영정과 인조(仁祖)의 생부(生父) 원종(元宗)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인 남별전을 관리하던 종9품 관직명이다. 문서의 발급일은 순치(順治) 16년 6월이고, 발급일 좌측에는 작은 글씨로 기오별가(己五 別加)라 임명사유를 밝히고 있다.
1659년(현종 즉위년)에 이조(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통덕랑(通德郞) 행남별전참봉(行南別殿參奉) 홍훤(洪藼)을 통덕랑(通德郞) 행평시서봉사(行平市署奉事)에 임명한 고신(告身)으로 교첩(敎牒)이라고도 부른다. 통덕랑은 정5품 상계(上階)의 품계명이고, 평시서봉사는 조선시대 시전과 도량형,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인 평시서의 종8품 관직명이다. 제수받은 관품이 관직보다 높기 때문에 조선시대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행(行)'자를 관직명 앞에 명시하였다. 문서의 발급일은 순치(順治) 16년 6월로 일자는 기재하지 않았다.
이연(발급), 홍훤(수취) | 서울특별시 종로구 | 1장 | 順治十七年(1660)
1660년(현종 1)에 현종이 홍훤(洪藼)을 조산대부(朝散大夫) 행평시서봉사(行平市署奉事)로 임명한 고신(告身)이다. 조산대부는 종4품 상계의 품계명이고, 평시서봉사는 조선시대 시전과 도량형,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평시서의 종8품 관직명이다. 제수 받은 품계보다 관직이 낮기 때문에 행수법(行守法)에 의거하여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발급일은 순치(順治) 17년 정월 초6일이고 발급일 좌측에는 작은 글씨로 '국장시집사가(國葬時執事加)'라는 임명사유가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