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숙종 13) 春川府에서 정묘년(1687)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참고하여 通訓大夫 前行咸興判官 咸興鎭管兵馬節制都尉 洪藼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훤은 신유(1621)생으로 당시 나이는 67세이고, 본관은 남양이며, 춘천부 東山外面 萬宜洞里 第三統 第二戶에서 살았다.
홍훤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從仕郞 洪振湖이고, 조부는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洪琡이며, 증조부는 贈通訓大夫 弘文館直提學 知製敎 兼經筵侍講官 春秋館編修官 行通訓大夫 豊基郡守 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 兼春秋館編修官 洪翼俊이다. 외조부는 通德郞 金添命으로 본관은 선산이다.
가족은 처 淑人 李氏와 아들 洪徵叙 내외, 사위 尹積慶 내외, 외손자 尹原一 내외, 尹聞一, 尹能一이 있다.
처는 숙인 이씨로 무오(1618)생이고, 나이는 70세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처의 사조를 보면 부친은 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李慶集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豊儲倉奉事 李溧이며, 증조부는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經筵事 世子右副賓客 五衛都摠府副摠管 李廷馨이다. 외조부는 宣務郞 南斗一로 본관은 의령이다.
홍훤 내외는 아우 洪菦의 아들, 즉 조카를 입양하였는데, 이름은 洪徵叙(洪周叙로 개명)이고, 갑진(1664)생으로 나이는 24세이다. 처는 孺人 俞氏로 나이는 홍징서와 동갑이고, 본관은 기계이다.
사위 가족도 함께 살았는데, 사위 宣略將軍 行龍驤衛副司果 尹積慶은 경진(1640)생으로 나이는 48세이고, 본관은 파평이다. 처 令人 洪氏는 임오(1642)생이고, 나이는 46세이다. 첫째 외손자 유학 윤원일은 신축(1661)생으로 나이는 27세이다. 처 孺人 金氏는 윤원일과 동갑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둘째 외손자 윤문일은 정미(1667)생으로 나이는 21세이다. 셋째 외손자 윤능일은 정사(1677)생으로 나이는 11세이다. 본 문서에는 윤원일, 윤문일, 윤능일을 손자라고 기재하고 있으나 홍훤이 1672년 한성부에서 발급받은 준호구에 外孫이라 쓰고 있으므로 본 글에서는 외손이라고 썼다.
6년 전에 발급받은 1681년 준호구에는 이 문서에 기재된 가족 외에도 홍훤의 아우 洪蘊・洪葕・洪藎・홍근의 가족뿐만 아니라 누이의 아들로 보이는 조카 趙爲冕도 기재되었는데, 이 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이 준호구는 다른 준호구들과 비교할 때 노비를 기록한 부분에서 특징이 나타난다. 준호구 작성시 가족구성에 대한 기재가 끝난 후에 率奴婢秩, 外居奴婢秩, 逃亡奴婢秩을 순차적으로 기재하고 있다. 즉, 이 문서에는 주호 홍훤과 그의 사조, 처의 인적사항 및 사조를 기록한 후 솔노비질, 외거노비질, 도망노비를 기재하였다. 그리고 아들 홍징서와 사위 윤적경 내외 및 외손자들을 기록한 후 솔노비질, 외거노비질, 도망노비를 기재하였다.
이 준호구에는 府使의 서압이 없고, 4개의 官印이 찍혀 있으며, 문서의 말미에는 이 준호구는 갑자년(1684) 호구와 대조하여 발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周挾改印도 찍혀있지 않다.
문서의 보존상태는 양호하게 보이나 준호구에 보이는 부사의 서압과 주협개인 날인되어야 할 부분이 도할된 상태이다. 그리고 이 문서는 춘천 남양홍씨 가문에서 세로로 4번, 가로로 4번 접어서 보관하여 전해졌으며, 접혀진 모서리를 중심으로 약간의 오염이 있다.
홍훤과 관련해서는 호구문서 외에도 24건의 교령류 문서가 전한다. 이 문서들을 통해 홍훤은 1659년 진사에 합격하여 39세 때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종8품 平市署奉事부터 시작하여 종7품 宗簿寺直長, 정6품 戶曹佐郎, 종5품 工曹正郎, 정5품 刑曹正郎을 거치면서 약 20년간의 관직생활을 하였고, 관직에서 물러난 1675년 전후에 춘천으로 옮겨와 생활하였다.
주호의 거주지는 춘천부 동산외면 만의동리로 이곳은 지금의 춘천시 동면 만천리 일대이다. 현재까지 종가를 포함하여 5~6호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