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0년(숙종 16) 春川府에서 경오년(1690)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참고하여 通訓大夫 前行咸興判官 咸興鎭管兵馬節制都尉 洪藼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훤은 신유(1621)생으로 당시 나이는 70세이고, 본관은 남양이다. 春川府 東山外面 萬法洞里 第三統 第二戶에서 처 淑人 李氏와 아들 洪徵叙 내외, 사위 尹積慶 내외, 외손자 尹原一 내외, 외손자 尹師一, 외손자 尹能一과 함께 살았다. 본 문서에는 외손자에 대해 外孫이라 기재하지 않고 孫이라 기재하였으나 연관문서에 따르면 이들은 외손자이다.
홍훤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從仕郞 洪振湖이고, 조부는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洪琡이며, 증조부는 贈通訓大夫 弘文館直提學 知製敎 兼經筵侍講官 春秋館編修官 行通訓大夫 豊基郡守 安東鎭管兵馬同僉節制使 兼春秋館編修官 洪翼俊이다. 외조부는 通德郞 金添命으로 본관은 선산이다.
처 숙인 이씨는 무오(1618)생으로 나이는 73세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처의 사조를 보면 부친은 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李慶集이고, 조부는 通訓大夫 行豊儲倉奉事 李溧이며, 증조부는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經筵事 世子右副賓客 五衛都摠府副摠管 李廷馨이다. 외조부는 宣務郞 南斗一로 본관은 의령이다.
홍훤 내외는 아우 洪菦의 아들을 입양하였는데, 이름은 洪徵叙(洪周叙로 개명)이고, 갑진(1664)생으로 나이는 27세이다. 처는 孺人 俞氏로 나이는 홍징서와 동갑이고, 본관은 기계이다.
사위 일가도 주호와 함께 살았다. 사위 宣略將軍 行龍驤衛副司果 尹積慶은 경진(1640)생으로 나이는 51세이고, 본관은 파평이다. 처 令人 洪氏는 임오(1642)생이며, 나이는 49세이다. 첫째 외손자 유학 尹原一은 신축(1661)생으로 나이는 30세이다. 처 孺人 金氏는 윤원일과 동갑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둘째 외손자 尹師一은 개명하였는데, 본래 이름은 尹聞一이며, 정미(1667)생으로 나이는 24세이다. 셋째 외손자 尹能一은 정사(1677)생으로 나이는 14세이다.
이 준호구의 기재양식을 다른 준호구들과 비교할 때 가장 확연한 차이는 노비를 기록한 부분에서 보인다. 일반적으로 준호구 작성에서 노비와 관련된 부분은 가족구성에 관한 기재가 끝난 후에 率奴婢秩, 外居奴婢秩, 逃亡奴婢秩을 순차적으로 기재한다. 그런데 이 준호구에서는 주호 홍훤과 그의 사조, 처의 인적사항 및 사조를 기록한 후 솔노비질, 외거노비질, 도망노비를 기재하였고, 아들 홍징서와 사위 윤적경 내외 및 그의 자식을 기록한 후 솔노비질, 외거노비질, 도망노비를 기재하였다.
이 준호구에는 府使의 서압이 있고, 7개의 官印이 찍혀 있으며, 문서의 말미에는 정묘년(1687) 호구와 대조하여 발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문서의 좌측하단에는 周挾無改印을 찍어 수정한 글자가 없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准 文命生, 唱 金命得을 적었다. 준 문명생, 창 김명득은 준호구를 작성한 담당자를 의미한다. 준호구는 이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작성한 호구장적에 기초하여 작성하는데, 불러주는 자와 쓰는 자 두 명이 역할을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를 각각 '唱'과 '準'이라 하였다.
문서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이 문서는 세로로 4번, 가로로 4번 접어서 보관하였으며, 접혀진 모서리를 중심으로 약간의 오염이 있다.
홍훤과 관련한 연관문서로 호구문서 외에 24건의 교령류 문서가 있다. 연관문서를 통해 홍훤은 1659년 진사에 합격하여 39세 때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종8품 平市署奉事부터 시작하여 종7품 宗簿寺直長, 정6품 戶曹佐郎, 종5품 工曹正郎, 정5품 刑曹正郎을 거치면서 약 20년간의 관직생활을 하였고, 관직에서 물러난 1675년 전후에 춘천으로 옮겨와 생활하였다.
주호의 거주지로 기록된 춘천부 동산외면 만법동리는 지금의 춘천시 동면 만천리 일대이며 현재까지 종손을 포함한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