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6년 홍주서(洪周叙)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696.4211-20170501.2016000161
URL
복사
복사하기
·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춘천부(春川府)
수취 : 홍주서(洪周叙)
· 작성지역 춘천부
· 작성시기 康熙三十五年(1696)
· 형태사항 50.0 X 109.1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7 (적색, 정방형, 7.0*7.0, 春川府印)
1 (흑색, 장방형, 13.8*.5.0, 周挾參字改印)
· 원소장처 춘천 남양홍씨
· 현소장처 춘천 남양홍씨

연결자료

안내정보

1696년(숙종 22) 춘천부(春川府)에서 유학(幼學) 홍주서(洪周叙)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주서갑진(1664)생으로 당시 나이는 33세이고, 본관은 남양이다.
홍주서의 거주지는 춘천부 동산외면(東山外面) 만법동리(萬法洞里)이며, 처 기계유씨(杞溪俞氏), 아우 홍우서(洪禹叙), 조카 윤원일(尹原一) 내외, 조카 윤사일(尹師一) 내외, 얼질(孼姪) 홍세만(洪世萬)과 함께 거주하였다.

상세정보

1696년(숙종 22) 春川府에서 병자년(1696)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참고하여 幼學 洪周叙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주서갑진(1664)생으로 당시 나이는 33세이고, 본관은 남양이다. 본 문서에는 홍주서의 이름이 본래 洪徵叙인데, 洪周叙로 개명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홍주서1693년에 발급받은 준호구에 이미 동일한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어 정확한 개명 시기는 1693년 이전으로 파악된다.
홍주서春川府 東山外面 萬法洞里 第三統 第二戶에서 처 杞溪俞氏, 아우 洪禹叙, 조카 尹原一 내외, 조카 尹師一 내외, 孼姪 洪世萬과 함께 살았다. 연관문서인 1693년 준호구는 홍주서가 주호로서 발급받은 첫 번째 준호구로 가족으로 홍주서 내외만 기재되어 있으므로 홍주서 내외가 분호한 후 발급받은 문서로 짐작된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후 발급받은 본 준호구에는 6명의 가족이 더 기재되어 있다. 춘천 남양홍씨 족보에 따르면 부친 홍훤1693년에 사망한다. 이에 홍주서가 代子로서 가계를 계승한 것으로 짐작된다.
홍주서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通訓大夫 行刑曹正郞 洪藼이고, 생부는 通德郞 洪菦이며, 조부는 從仕郞 洪振湖이다. 증조부는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洪琡이고, 외조부는 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李慶集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기계유씨홍주서와 동갑이다. 유씨의 부친은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俞樸이고, 조부는 贈嘉善大夫 兵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行通訓大夫 麻田郡守 長湍鎭管兵馬同僉節制使 俞希曾이며, 증조부는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俞大儀이다. 외조부는 通政大夫 行鍾城都護府使 鄭就道로 본관은 연일이다.
아우 幼學 홍우서는 나이가 21세이고, 병진(1676)생이다. 조카 유학 윤원일은 나이가 36세이고, 신축(1661)생이며, 처 金氏와는 동갑이다. 조카 윤사일은 나이가 30세이고 정미(1667)생이며, 처 한씨는 25세로 임자(1672)생이다. 얼질 홍세만은 나이가 25세이고, 임자(1672)생이다. 가족 기재사항의 특점은 조카들의 처에 대해서는 본관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다.
노비와 관련된 부분은 가족구성에 관한 기재가 끝난 후에 각각의 率奴婢秩, 逃亡奴婢秩을 순차적으로 기재하였다.
이 준호구에는 行府使의 서압이 있고, 7개의 官印이 찍혀 있으며, 문서의 말미에는 이 준호구가 계유년(1693) 호구와 대조하여 발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문서의 좌측하단에는 周挾參字改印을 찍었으며, 그 아래에는 朴國建, 金初萬을 적고, 그 위에 관인을 찍었다. 박국건, 김초만은 준호구를 작성한 담당자를 의미한다. 준호구는 이전에 보고한 호구단자를 토대로 작성한 호구장적에 기초하여 작성하는데, 불러주는 자와 쓰는 자 두 명이 역할을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를 각각 ''과 ''이라 하였다.
문서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이 문서는 춘천 남양홍씨 가문에서 세로로 9번, 가로로 3번 접어서 보관하여 전해졌는데, 접혀진 하단부에 오염이 있어 문서를 펼친 상태에서는 굵은 띠 형태의 오염이 관찰된다.
홍주서와 관련해서는 이 문서 외에도 8통의 호구류 문서가 전해진다. 이 문서들에 의하면 홍주서는 직역이 유학으로 기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과거급제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사가 없어 숙부 洪葕의 둘째 아들인 洪攸叙의 아들 洪昌震을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또한 1711년에서 1726년 사이의 호구문서들에 의하면 홍주서는 이 시기 일시적으로 漢城府에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고민정, 南陽洪氏 益山君派의 春川移居와 定着, 朝鮮時代史學報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고문서연구센터, 春川 南陽洪氏家 古文書·古書, 강원대학교중앙박물관, 2007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