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년 홍주서(洪周叙) 준호구(準戶口)

ㆍ자료UCI: KNU+GWKSMC+KSM-XD.1720.1111-20170501.2016000146
URL
복사
복사하기
· 분류 고문서-증빙류-호적 |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 : 한성부(漢城府)
수취 : 홍주서(洪周叙)
· 작성지역 한성부
· 작성시기 康熙五十九年(1720)
· 형태사항 104.9 X 58.1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3 (적색, 정방형, 8.0*8.0, 漢城府印)
1 (흑색, 장방형, 13.8*5.4, 周挾改印)
· 원소장처 춘천 남양홍씨
· 현소장처 춘천 남양홍씨

연결자료

안내정보

1720년(숙종 46) 한성부(漢城府)에서 유학(幼學) 홍주서(洪周叙)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주서갑진(1664)생으로 당시 나이는 57세이고, 본관은 남양이다. 한성부(漢城府) 남부(南部) 명철방(明哲坊) 남소문동계(南小門洞契)에서 처 기계유씨(杞溪俞氏), 아들 유학(幼學) 홍창진(洪昌震), 며느리 연안김씨(延安金氏), 사위 유학 이희석(李希奭) 내외 및 2명의 외손자와 함께 거주하였다.

상세정보

1720년(숙종 46) 漢城府에서 경자년(1720)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참고하여 幼學 洪周叙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문서에 따르면 홍주서갑진(1664)생으로 당시 나이는 57세이고, 본관은 남양이다.
홍주서의 사조를 보면 부친은 通訓大夫 行刑曹正郞 洪藼이고, 생부는 通德郞 洪菦이며, 조부는 從仕郞 洪振湖이다. 증조부는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洪琡이고, 외조부는 嘉善大夫 行龍驤衛副護軍 李慶集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홍주서漢城府 南部 明哲坊 南小門洞契 第二十統 第四戶에서 처 杞溪俞氏, 아들 유학 洪昌震, 며느리 延安金氏, 사위 유학 李希奭 내외 및 2명의 외손자와 함께 살았다.
기계유씨홍주서와 동갑이다. 유씨의 사조를 보면 부친은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俞樸이고, 조부는 贈嘉善大夫 兵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行通訓大夫 麻田郡守 長湍鎭管兵馬同僉節制使 俞希曾이며, 증조부는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俞大儀이다. 외조부는 通政大夫 行鍾城都護府使 鄭就道로 본관은 연일이다.
아들 홍창진정축(1697)생으로 나이가 24세이고, 처 연안김씨병자(1696)생으로 나이가 25세이다.
사위 유학 이희석경오(1690)생으로 당시 나이는 31세이고, 본관은 함평이다. 이희석의 처는 南陽洪氏기사(1689)생이며, 나이는 32세이다. 첫째 외손자 李垿무자(1708)생으로 나이가 13세이고, 둘째 외손자 李埏신묘(1711)생으로 나이가 10세이다. 사위의 가족은 이 문서에서 처음 기재되었다.
노비는 가족구성에 관한 기재가 끝난 후에 각각의 率奴婢秩, 逃亡奴婢秩로 구분하여 순차적으로 기재하였다.
이 준호구에는 堂上, 郎廳, 監董官의 서압이 있고, 3개의 官印이 찍혀 있다. 문서말미에 찍혀진 관인 위에는 周挾改印이 날인되어 있다. 문서의 말미에는 이 준호구가 정유년(1717) 호구와 대조하여 발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준호구에는 발급시기와 발급 관부, 참고한 호구장적, 주소, 주호의 직역・성명・나이・본관, 주호의 사조, 주호 처의 성씨・나이・본관, 주호 처의 사조, 같이 거주하는 자녀의 나이, 노비의 나이 등을 기재한 후 발급자의 수결, 관인, 호적장적과 비교하여 내용을 수정했는지 여부를 표시하는 周挾改印을 날인하였다. 준호구의 작성 시기는 반드시 중국의 연호를 썼고, 참고한 호적장적에서 마지막 내용인 노비의 기재사항까지 連書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본 문서도 이러한 규정에 따라 작성되었다.
문서의 보존상태를 살펴보면 이 문서는 세로로 9번, 가로로 4번 접어서 보관했으며 접혀진 모서리의 일부가 마모되어 문서를 펼치면 5곳에서 탈락이 관찰된다.
주호의 거주지로 기록된 한성부 남부 명철방 남소문동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장충동 1가장충동 2가광희동 1가광희동 2가을지로 6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남소문동은 남소문이 있어 남소문골남소문동남소동이라고 한 데서 계 이름이 유래되었다.
홍주서와 관련한 연관문서로 이 문서 외에 8통의 호구류 문서가 있다. 이 문서들에 의하면 홍주서의 직역이 유학으로 기재되었는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홍주서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사가 없어 숙부 洪葕의 둘째 아들인 洪攸叙의 아들 洪昌震을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또한, 1711년에서 1726년 사이의 작성된 호구문서들에 의하면 홍주서는 이 시기 일시적으로 한성부에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남양홍씨 족보에 따르면 홍주서1727년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5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고민정, 南陽洪氏 益山君派의 春川移居와 定着, 朝鮮時代史學報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고문서연구센터, 春川 南陽洪氏家 古文書·古書, 강원대학교중앙박물관, 2007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집필자 : 황은영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