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순조 13) 春川府에서 계유년(1813)에 작성한 호구장적을 참고하여 通德郞 洪履正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홍이정의 개명 전 이름은 洪履八이었는데, 1771년 조부 洪昌震이 발급받은 준호구에는 홍이정의 이름이 洪履正에서 홍이팔로 개명되었고, 본 준호구에서는 다시 洪履正으로 개명하였다.
문서에 따르면 주호 홍이정은 임신(1752)생으로 당시 나이는 62세이고, 본관은 남양이다. 東山外面 萬法洞里에서 처 恭人 宋氏, 從弟 洪履七 내외와 五寸侄 童蒙 洪箕錫과 함께 살았다. 남양홍씨 족보에 따르면 홍이정은 1825년에 사망한다.
홍이정의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通政大夫 行承政院同副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洪彦喆이고, 조부는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洪昌震이며, 증조부는 通德郞 洪周叙이다. 외조부는 通德郞 李東膺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주호의 처 공인 송씨는 정해(1767)생으로 나이는 47세이고, 본관은 여산이다. 사조사항을 보면 부친은 學生 宋應發이고, 조부는 학생 宋之復, 증조부는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宋元俌이다. 외조부는 학생 慶日觀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종제 이칠은 병술(1766)생으로 나이가 48세이고, 제수 全州李氏는 병신(1776)생으로 나이는 38세이다. 연관문서에 따르면 오촌 조카인 홍기석은 홍이칠의 아들로 이 문서에서 새롭게 기재되었는데, 당시 나이는 16세이고 무오(1798)생이다.
노비에 대한 내용은 連書하지 않고 행을 바꾸어 기재하였는데, 率奴婢秩, 外居秩, 逃亡秩 순으로 구분하여 기재하고 있다.
문서의 기재사항 끝에는 경오년(1810) 호구와 대조하여 발급한 것임을 밝히고 그 좌측으로 官印과 周挾改印을 겹쳐 찍었다. 문서의 좌측상단에는 署押을 찍었다.
본 문서의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나 우측 하단부에 일부 결락이 있다. 춘천의 남양홍씨 가문에서 가로로 4번, 세로로 8번 접어진 상태로 보관되어 전해졌다.
홍이정과 관련하여서는 호구류 문서 10통과 관첩 2건이 현전하는데, 이 관첩에 따르면 홍이정은 1777년에는 將仕郞, 1778년에는 從仕郞에 임명되었다.
주호의 거주지로 기록된 춘천부 동산외면 만법동리는 지금의 춘천시 동면 만천리 일대로 현재까지 종손을 포함한 후손들이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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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