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8년 박중신(朴中信) 홍패(紅牌)

ㆍ자료UCI: KNU+GWKSMC+KSM-XA.1438.1111-20160501.2015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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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교령류-홍패 | 정치/행정-과거-홍패
· 작성주체 발급 : 세종 이도(李陶)
수취 : 박중신(朴中信)
· 작성지역 한성부
· 작성시기 正統三年(1438)
· 형태사항 104.0 X 82.9 | 1장 | 종이 | 한자 | 낱장
· 인장서명 1 (적색, 정방형, 10.0*10.0, 國王信寶)
· 원소장처 강릉 강릉박씨
· 현소장처 오죽헌시립박물관

안내정보

이 문서는 1438년(세종 20) 4월 17일에 선교랑(宣敎郞) 양양유학교도(襄陽儒學敎導) 박중신(朴中信)이 문과 정과(丁科) 제3인으로 급제하고 발급받은 홍패다.
문서를 보면, 오른쪽 위에 교지라 쓰고 가운데에 선교랑 양양유학교도 박중신이 문과 정과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는 내용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문서를 발급하는 연도와 날짜를 쓴 후 두 번째 글자와 세 번째 글자 사이에 도장을 찍었다.

상세정보

이 문서는 1438년(세종 20) 4월 17일에 宣敎郞 襄陽儒學敎導 朴中信이 文科 丁科 제3인으로 급제하였음을 증명하는 紅牌이다. 선교랑은 문관 종6품 상계이고 교도는 지방 군현의 향교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벼슬을 말한다. 교도직은 문관들이 지방에 파견되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生員과 進士 중에서 선임하여 파견했다.
홍패는 문무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교지로 붉은 종이에 기재하여 홍패라 칭하였다. 조선 초 홍패는 문무과의 내용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으며, 잡과합격자에게도 홍패가 발급되는 등 홍패의 양식과 기준이 정해지지 않았다가 '경국대전' 편찬으로 홍패식, 백패식, 잡과백패식으로 명시되면서 이를 근거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초기에는 문과를 乙科, 丙科, 同進士로, 무과를 一, 二, 三等으로 나누었다. 이후 1438년(세종 20)부터 문과는 을과, 병과, 정과로 나누었고, 이를 다시 1468년(세조 14)부터 갑과, 을과, 병과 세 등급으로 나누게 되었다. 또한 홍패에 사용된 인장은 조선 전기에는 科擧之印이었고, 인조 연간에 科擧之寶로 바뀌게 되었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문서 오른쪽 위에 교지라 적고 가운데에 宣敎郞 襄陽儒學敎導 朴中信이 文科 丁科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는 내용을 적었다. 문과 최종 합격자는 갑과에 3인, 을과에 7인, 병과에 23인을 뽑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박중신은 전체 13등으로 합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서를 발급하는 연도와 날짜를 쓴 후 두 번째 글자와 세 번째 글자 사이에 도장을 찍었다. 이 문서의 발급 연도인 1438년무오년이기 때문에 박중신이 치른 시험은 式年試이다. 식년시는 子, 卯, 午, 酉의 간지가 포함되는 해에 시행하는 정기 시험을 말한다. 한편 식년시와는 다르게 국가에 특별한 경사가 생겨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행하는 특별 시험으로는 增廣試가 있다.
박중신의 본관은 강릉이고, 字는 叔立이다. 박중신의 조부는 奉善大夫書雲副正 朴之桂이고 부친은 通政大夫 知端川郡事 朴自儉이다. 1417년(태종 17)에 司馬試에 합격했고, 1438년(세종 20) 무오식년시 정과에 합격했다. 原州敎授, 歙谷縣令, 義禁府都事, 成均館注簿, 司憲府監察, 永興判官 등을 역임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유지영, 조선시대 임명관련 교지의 문서형식, 古文書硏究30, 한국고문서학회, 2007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鄭求福, 朝鮮朝의 告身(辭令狀) 檢討, 古文書硏究9·10, 한국고문서학회, 1996
집필자 : 조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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